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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꾸란에서의 각의 장은 “비스밀라”로 시작합니다. 또한 모든 무슬림은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비스밀라”라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비스밀라” 는 무슨 의미입니까?
    비스밀라(Bismillah)는 모든 좋은 일의 시작입니다. 이 축복받은 말은 이슬람의 표시이며, 모든 존재가 몸짓으로 끊임없이 하는 기도입니다. 예를 들면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여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부족장의 이름으로 움직여야 하며, 그의 보호를 받아야지만 노상강도의 피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고 필요한 것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수없이 많은 적과 필요한 것들로 인해 매우 고생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겸손하였으나 다른 한 명은 오만하였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족장의 이름으로 움직였고 오만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족장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어느 곳이나 안전하게 돌아다녔고 가다가 노상강도를 만나게 되면 “나는 부족장의 이름으로 돌아다닌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노상강도가 건드리지 못하고 가버렸을 뿐만 아니라 어떤 천막으로 들어가면 그 이름 덕분에 존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반면에 다른 오만한 사람은 여행하는 동안 상상도 못 할 고생을 하며, 항상 공포에 떨며 거지처럼 구걸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모멸과 수치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만한 나 자신이여! 당신은 바로 그 여행자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의 사막이며, 당신의 무능력과 빈곤은 무한하며 적과 필요한 것들은 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막의 ‘영원한 주인이신 하나님’과 ‘시작과 끝이 없는 지배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온 삼라만상에 구걸하지 않고 모든 사건 앞에 두려움으로 떨지 않으며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표현은 그토록 축복받은 금고이며 당신의 끝이 없는 무능력과 빈곤이 끝이 없는 권능과 자비로 연결되어 ‘전능하고 자애로우신 분’의 앞에서 무능력과 빈곤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중재자로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이 표현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이 사람과 같습니다. 군에 입대하여 나라의 이름으로 행동하며 누구든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법의 이름으로’ 또는 ‘나라의 이름으로’라고 하며 실시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견딜 수 있습니다. (창조주를 찾는 것 - 첫 번째 말씀 중) (Risale-i Nur Collection - Words
  • 오로지 인간만이 “비스밀라”라고 합니까? 아니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스밀라”라고 하며 전능하신 창조주의 이름으로 행동합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몸짓으로 ‘비스밀라’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전능하신 창조주의 이름으로 행동합니다. 지극히 작은 곡물과 씨앗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큰 나무를 들고 산과 같은 짐을 들어 올립니다. 즉 각각의 나무가 ‘비스밀라’라고 하며 자비의 금고인 과일로 자신의 손을 가득 채워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각각의 텃밭은 ‘비스밀라’라고 하며 권능의 부엌에서 하나의 큰 냄비가 되고 그 냄비 안에 상당히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같이 끓여집니다. 소, 낙타, 양, 염소 등 축복받은 동물들은 ‘비스밀라’라고 하며 자비로운 풍요로움으로부터 각각 우유의 원천이 되어, 양식을 주시는 분의 이름으로 가장 사랑스럽고 깨끗하며 생명의 물과 같은 영양을 우리에게 바칩니다. 각각의 식물과 나무와 풀의 실크 같은 부드러운 뿌리는 ‘비스밀라’라고 하며 딱딱한 돌과 흙을 꿰뚫어 통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하므로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정신적으로 ‘비스밀라’라고 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창조주를 찾는 것 - 첫 번째 말씀 중) (Risale-i Nur Collection - Words)
  • 이 세상은 신앙자가 보기에 어떻게 보이나요?
    그는 전능하신 창조주를 알고 인정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암송되는 장소, 인간과 동물이 훈련되는 곳, 그리고 인간과 진이 시험을 보는 마당입니다. 모든 동물과 인간의 죽음은 군대에서 제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의무를 마치는 자들은 이 일시적인 곳에서 홀가분하게 혼란이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갑니다. 그래야만 신입 근무자들을 위한 자리가 생길 수 있으며 그들이 와서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동물과 인간의 출생은 군 징병이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의 각 하나하나는 행복한 군인, 올바르며 기뻐하는 공무원들입니다. 모든 소리는 임무 수행 시작 시 하는 암송이나 찬송 또는 일의 끝마침으로 인한 고마워함 또는 기뻐함 이거나 아니면 일하는 것의 즐거움으로 인해 나오는 노래들입니다. 그 신앙자가 보기에 모든 피조물은 관대하신 주인, 자비로우신 소유자의 친근한 하인, 친절한 공무원, 달콤한 책입니다. 이와 같은 상당히 섬세하고, 높고, 맛있고, 달콤한 진실은 그의 신앙으로부터 비치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찾는 것 - 두 번째 말씀 중) (Risale-i Nur Collection - Words)
  • 이 세상은 불신자와 타락하고 등한시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나요?
    이 세상은 그가 보기에 전체적으로 애도하는 집과 같습니다. 모든 생물은 헤어지는 것과 사라짐의 손찌검으로 인해 우는 고아들과 같습니다. 동물과 인간은 정해진 ‘죽음의 순간’의 발톱으로 찢긴, 돌보는 사람이 없는, 목표 없이 사는 존재들과 같습니다. 산이나 바다 같은 큰존재들은 영혼이 없는 끔찍한 시체들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억압하며 공포스러운 많은 망상은 자신의 불신하고 타락한 마음으로 인해 생기며 그를 정신적으로 고뇌하게 만듭니다. (창조주를 찾는 것 - 두 번째 말씀 중) (Risale-i Nur Collection - Words
  • 순수한 의도는 숭배행위를 어떻게 더 빛나게 하나요?
    답변: 숭배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의도로 해야 합니다. 단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단식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단식을 통해 건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장기들이 쉼으로써 편안함을 주는 등 육체에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만일 살을 빼기 위한 의도로 단식을 하는 사람과 함께 수후르(라마단 단식 중 금식 전 새벽 식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고, 단식을 시작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가요? 바로 건강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숭배행위가 아니라 단지 굶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단식을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바로 숭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좋아지게 또는 나빠지게 하기도 하시며 장기들이 편안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럽의 어떤 학자가 “인간은 온종일 에너지를 축적한다. 따라서 편안해지기 위해 이 에너지를 내보내는 것이 필요하며, 만일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해서 땅바닥에 대면 이 에너지는 몸에서 나가게 되며 바깥으로 버려지게 되고 결국 편안해지게 된다. 따라서 당신도 이것을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니, “바로 이것들이 예배의 효과이며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건강을 얻게 됩니다. 당신들도 건강을 얻기 위해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얼마나 옳은 말일까요? 옳을지도 아니면 옳지 않을지도…. 그러나 샤즈다(예배시 절을 하는 것)를 할 때 이 건강 측면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샤즈다를 해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숭배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몸 안의 과잉된 에너지를 버리기 위한 생각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면 이것은 숭배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형제, 자매들은 사람들이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또는 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예배의 건강상 측면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숭배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베디웃자만(Bediüzzama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숭배행위란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만족을 위해 행하는 것(İhlas: 이흐라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그 목표 또한 오로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함입니다. 즉, 오로지 내세를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이 경배행위로 인해 원래 목표하지는 않았지만, 물질적 이득이 발생했다면 이것은 숭배로 간주됩니다. 이는 오히려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숭배행위를 더 하게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경배나 찬미를 세상의 이득을 위해 한다면 행했던 일부분은 행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며, 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경배가 헛되게 되며, 아무런 결과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리살레이누르 모음집 중 섬광들(Lemalar)) 이런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 예를 들면 우리는 기도가 가지고 있는 효과를 얻기 위해 샤흐 낙시벤디(Sahi Nakşibend: 이슬람 수피학자)의 백 가지 이상의 특별한 효과가 있는 에브라디 쿳시예(Evradı Kudsiye: 기도집) 또는 천 가지 이상의 특징이 있는 제브셰눌 케비리(Cevşenul Kebiri: 사도 무함마드께서 하신 기도 모음집)등의 기도들을 읽습니다. 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며 볼 수도 없으며 볼 만한 권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효과들은 기도들을 읽는 본질적인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들을 할 때 그런 혜택이나 특징들을 최종적인 목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효과들은 그것들을 바라며 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결과들입니다. 그런 효과들을 바라면서 기도를 한다면 순수한 의도를 상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경배행위에서 벗어나며 그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가치가 있는 기도를 사람들이 읽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앙심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기도의 효과들을 생각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만족과 내세를 위해 열렬하게 그 기도를 읽는다면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며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이 비밀을 모르는 많은 사람은 명망 있는 이슬람 학자들 또는 세레프 이 살리힌(Selef-i Salihin: 이슬람 초창기의 학자들)이 전달한 효과들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의심을 하거나 더군다나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순수한 의도로 기도를 읽지 않는다면 신문을 읽듯이 읽게 되며 기도의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밤 사도님을 꿈에서 보고 싶다’라는 의도로 기도를 읽지만 보지 못하는 것처럼….
  • 질문: 숭배란 매일 매일 밤을 새우며 아침까지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해진 경배행위들을 더 많이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숭배에는 더 넓은 의미가 포함되는 것일까요?
    답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은 모두가 경배행위입니다. 이와 함께 문맹이거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비롯해 지식인들, 예언자들과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쉽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경배입니다. 경배란 ‘딱 정해진 선이 있습니다’라거나, ‘이런 것들입니다’라고 범위를 정할 수 없습니다. 매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맞이하는 일들, 가족들 간에 행해지고 있는 행동이나 태도뿐 아니라 가장 사소한 것들까지 포함한 삶의 모든 부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숭배의 사전적 의미: 종이 되는 것, 노예가 되는 것, 복종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와 완전히 관계를 맺는 것 등의 의미를 포함한 아랍어 ‘abd(종)’이라는 단어의 어근으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이렇듯 숭배라는 단어에는 아주 다양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뜻은 ‘오로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행동하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로부터 피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종임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숭배와 경배는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되었으나 의미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수흐레베르디(Suhreverdi: 이슬람 수피학자)와 같은 학자들은 ‘종(abd, abid)’이라는 단어의 어근에 더 의미를 두며 숭배와 경배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경배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실천하면서 금지된 것들로부터 피하는 것 즉 ‘종이 되는 것’이며, 숭배란 매 순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알고 그분의 종임을 인식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즉, 숭배는 경배보다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숭배는 경배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숭배란 삶의 모든 부분과 매 순간에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에 반해 경배란 예배, 단식, 희사, 선행과 같은 실천적인 행위들입니다. 우리는 숭배와 일상생활을 따로 구별 지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따로따로 구별 짓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들은 정해진 장소(교회, 성당, 절 등)에 가서 경배행위를 하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순간 경배행위가 끝나며, 그 장소 밖에서는 즉시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없습니다. 즉 이슬람에서 신앙인은 성원에서 경배행위를 하고 난 뒤에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 즉 가게, 직장, 집에서도 숭배 안에 있는 것이 가능합니다. ‘영원한 평화’ 즉 매 순간 하나님의 앞에 있음을 인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여행할 때도 바로 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즉, 이슬람에서 숭배를 보는 관점은 매우 포괄적이며 삶의 모든 부분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곳에 숭배행위는 없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소도 없으며 심지어 자려고 누워 있는 그 순간에도 숭배행위를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잠에서 깬 후 “지금 숭배할 시간이야? 조금만 더 쉰 후에 할게.”라고 구별 짓지 맙시다. 왜냐하면 우리 무슬림들에게 숭배행위란 24시간을 포함하며, 일 분 일 초조차도 예외일 수 없으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무슬림들의 세상 전체가 바로 숭배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 질문: 우리는 왜 경배를 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부담감을 짊어주셨을까요?
    답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보다 인간에게 더 다양한 능력들을 부여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은 이성이라는 은총을 부여받아 무척이나 다양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위의 그 어떤 피조물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특징들, 능력들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임무 또한 다름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무척이나 우수하다는 관점에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들을 인간에게 아무 이유 없이 부여하지 않았다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에게 물어보고 나를 창조했어?” 또는 “나는 부담을 지기 싫어. 동물처럼 그냥 편하게 살 거야”라며 그 주제에서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편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숭배행위로부터 멀리 벗어나거나, 경배행위들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합니다. ‘덥거나 추운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그냥 편히 있는 것이 더 편해!’, ‘한 달 동안 매일 금식을 하며 배고픔을 느끼기보다는 원하는 시간에 먹고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편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좁은 창문에서 볼 때는 그렇게 보입니다. 경배 행위들을 실천하는 것이 불편함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자체에 모순됩니다. 이렇게 높은 하드웨어와 장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처럼 사는 것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높은 수준에서 낮아지는 것은 물론 동물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짐을 의미합니다. 동물은 과거는 물론 미래도 없습니다. 굶을까 봐 걱정하지도 않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 오로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저 두려움을 느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위험한 상황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삶을 살아갑니다. ‘내일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길까?’라며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편안하게 먹고 마시고 창조주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과 이해하는 능력 같은 특성 등이 인간을 모든 상황으로 이끕니다. 한편에서는 어제 생긴 문제로 우리를 힘들게 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우리를 옥죄어 옵니다. 바로 앞에 죽음 같은 큰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말이 됩니까? 주변의 친구나 가족들이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가고 있음을 보면서도 ‘나는 동물처럼 살아갈 거야.’라고 하며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요? 우리 또한 똑같은 문으로 넘어갈 것을 알면서도 편안하게 앉아서 그 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우리를 그 문 앞으로 이끄는 매초, 매분, 매시간이 우리에게 형벌을 주는 게 아닐까요? 겉으로 보기에 편안해 보일지라도 내면에는 근심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수준 높은 하드웨어, 장비는 ‘동물처럼 살지 않을 것’ 또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 질문: 인간은 어떻게 이 세상의 창조주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을까요?
    답변: 인간에게 있는 특별한 어떤 특징으로 인해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무능력하며 나약하고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특징은 인간을 ‘지상의 대리인’ 즉 지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허락으로 행동하는 대화 상대로 올라갈 수 있게 합니다. 꾸란에서 ‘위탁물’이라고 정의하는 이것은 바로 사람에게 있는 그 특징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꾸란에서 "하나님이 하늘과 대지와 산들에 위탁물을 보였으나 그것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으니, 두려웠기 때문이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였으니.” (꾸란 33장 72절)라고 정의하셨다. ‘위탁물’이라는 단어를 학자들은 ‘의무들, 부담들, 이성과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베디웃자만(Bediüzzaman)은 이 꾸란 구절을 해석할 때 이 ‘위탁물’이라는 단어를 어떤 한 측면에서 ‘자아’ 즉 ‘자만심, 자기 본위’ 등으로 해석하며, 자아에 숨겨져 있는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늘, 땅, 산이 짊어지는 것으로부터 피하고 무서워하는 위탁물의 다양한 관점 중 하나는 바로 ‘자아’ 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아’란 아담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빛나는 천국의 나무(투바 나무, tuba)와 함께 공포스러운 지옥의 나무(자꿈 나무, zakkum: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자라는 나무로 매우 쓰고 불쾌하며 자극성 있는 나무)의 씨앗입니다.”(리살레이누르 모음집 중 말씀들(Sözler))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아’라는 감정을 잘 알고 잘 사용해야 합니다. 만약 잘 사용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대화 상대가 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무척 높아지며,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께 선택된 손님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반대로 이용하는 경우 인간의 창조 목적에 반대되는 행동들을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즉 ‘자아’에는 천국뿐만 아니라 지옥에 다다를 수 있는 씨앗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씨앗들 중 어떤 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즉 어떤 것을 땅에 뿌리느냐에 따라 그 나무가 땅을 뚫고 나올 것이며, 자랄 것입니다. 오로지 두 가지 길이 있으며 다른 선택은 없고, 한 곳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바로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선택하여 그 길로 가거나 아니면 잘못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아’를 올바르게 사용한 좋은 예로는 예언자들, 순수한 학자들 또는 높은 성인들이 있고, 좋지 않은 예로는 역사에서 재앙의 원인이 된 니므롯(니므롯: 기원전 24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복자, 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가장 강한 신적인 존재로 봄.), 파라오 등의 억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 질문: 인간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답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따라가면서 자신 또는 남들을 억압하기 위해서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숭배라는 옷의 책임을 부여해 꾸란에서 명령하신 것들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점에 들러 어떤 전자 제품을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제품의 박스 안에 사용 설명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왜 사용 설명서를 그 안에 넣었을까요? 그 제품을 쉽고 편안하게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물론 사용설명서 없이도 사용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금방 고장 나거나 아니면 아주 중요한 특징을 모르고 사용하게 됩니다. 바로 ‘꾸란의 명령’이라고 할 때 일부 사람들은 무서워합니다. 마치 꾸란이 인간을 새장 안에 가두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꾸란은 우리를 위한 사용 설명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꾸란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숭배의 범위 안에서 꾸란의 명령을 실천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특성들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게다가 오로지 60년, 70년이라는 일시적인 시간에 제한되지도 않으며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먼저 꾸란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하늘의 책(구약, 신약 등)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예언자들, 순수한 학자들, 성인들, 높은 지식을 가진 학자들, 진리를 찾는 자들 등…. 진실로 이것을 조금이라도 실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더욱 아름답게 살며 꾸란에서 이야기한 것들이 올바른 것임을 자신 스스로 이해합니다.
  • 인간 이외에 다른 피조물들도 숭배를 합니까?
    숭배란 오로지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인 인간만이 하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새, 곤충 등의 동물들 각자가 특별한 숭배행위를 하는 것처럼 나무, 꽃 등의 식물들 또한 숭배행위를 하고 있다. 오로지 생명이 있는 존재들만 숭배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돌, 흙, 태양, 별… 모든 생명이 없는 존재들도 숭배를 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만의 특별한 숭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이 숭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을까? 바로 꾸란에서 알 수 있다. 몇몇 꾸란 구절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은 산천으로 하여금 그와 함께 아침과 저녁으로 합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했노라.”[1] “하늘과 대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새들은 날개를 펴 찬미하고 있음을 그대는 보지 못하느뇨. 모든것은 제 스스로 경배하고 찬미함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라.” [2] “칠천과 대지가 그분을 영광되게 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니 영광으로 그분을 찬미하지 않는 것 하나도 없도다. 너희가 그들의 찬미를 알지 못하나 실로 하나님은 자비와 관용으로 충만하심이라.“[3] 위 꾸란 구절들에서 아주 분명하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미하고 있음을, 즉 숭배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변에 있는 지각이 없는 생물들과 전혀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직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며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한 것을 실천한다면 그는 바로 숭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들을 행한다면 그 피조물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베디웃자만(Bediüzzaman)은 이렇게 설명한다.[4]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게나! 생명이 있든, 생명이 없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완벽하게 의무들을 실행하며 숭배를 한다. 일부는 이성이 없으며, 감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이성적으로 또는 질서 있게 직무들을 실행한다. 즉 모든 피조물들은 마부드-빌학(Mabud- Bilhak : 숭배 받기에 마땅하신 하나님) 또는 아미르 무틀락(Amir Mutlak :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숭배를 한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 모두에게 각각의 임무들을 부여하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전혀 미흡하지 않게 완전한 복종으로 실천한다. 예를 들면 태양은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수천년간 같은 임무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는 지쳤어. 이제는 햇빛과 열을 주고 싶지 않아“ 라고 하지 않으며 완벽하게 의무들을 지속한다. 과수들은 과일을 제공하며, 꿀벌들은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꿀을 만드는 것을 지속한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들을 나열하면 볼 수 있듯이 그들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질서 있게 복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부여하신 임무들을 수행하면서 그들을 창조하신 분을 숭배하며 찬미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꾸란 구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는 것을 베디웃자만(Bediüzzaman)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5] “꽃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수와 예술을 보여주며 몸짓으로 하나님의 이름들을 찬미하고 있듯이 이 지상의 정원도 커다란 꽃과 같다. 무척이나 큰 찬미의 임무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들을 지상의 언어로 찬미한다. 과일이 조화(하모니)와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공표하고 찬미하는 것처럼,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 나뭇잎, 꽃 등의 모든 부분들로 전시하는 임무를 통해 숭배를 하고 있다. 나무의 단어들인 나뭇잎, 과일, 꽃이 하나님을 찬미하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 넓은 하늘이라는 바다의 단어들인 태양, 별들, 달은 창조주인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양한다.” 즉 다시 말하면 완벽하게 창조된 피조물들은 몸짓으로 자신들의 창조주를 찬미한다. 왜냐햐면 작품이 존재하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술가의 특징들의 완벽함을 보여준다. 예를들면 어떤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인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만들지 못한 어떤 것을 발명했다면 그 발명품을 본 사람들은 그 발명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발명품을 본 사람들은 그 발명가를 보지 않더라도 그 전문가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발명품은 몸짓으로 그 전문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 전문가가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님께서 완벽하게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들만의 몸짓으로 우리의 주님을 설명하며 그의 특징들의 완벽함을 알려주고 있다. 즉 “우리를 만든 창조주의 특징들은 완벽하며 그에게 어떠한 결점도 없으며 우리의 아름다움은 그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라고 하며 그들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찬미한다. 어떤 성을 예로 들어보자: 무척 예술적이며 섬세한 자수로 장식되어 있는 어떤 궁전이 있다고 치자. 궁전에 있는 모든 돌 각각 하나 하나에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궁전 안의 경치나 풍경은 계속해서 수시로 바뀌고 있으며 사람이 옷을 갈아 입는 것처럼 그 궁전의 벽은 각각 다양한 색깔로 바뀌고 그 벽에는 각각의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섬세한 문양을 주의 깊게 보면 그 궁전의 전체 풍경이 보인다. 그리고 궁전 안의 장식은 계속해서 새로워지며 아름다워진다. 매시간 최상의 음식들로 식탁이 차려지며 치워지고 그 음식들은 아주 맛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것들… 등 이처럼 완벽한 궁전을 본 사람은 이 솜씨 좋은 전문가에 반하며 “하나님께 축복이 있으소서! 얼마나 완벽하게 만들었소!” 라고 할 것이다. 이 궁전은 자신의 몸짓으로 그 전문가가 얼마나 솜씨가 좋으며, 지식이 많으며, 숙련됐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웅장한 세상은 그 궁전과 같다. 달과 태양의 조명들, 별들과 시간의 촛불들은 한가지의 실 또는 줄이며 그 위엄 있는 창조주께서 매년 다른 세상을 그곳에 매달아 보여주신다. 그분은 새로 온 세상의 수천 개의 피조물들의 모양들을 바꾸시며, 완벽하게 정리된 체계 안에서 새롭게 하신다. 지상을 거대한 식탁처럼 매 가을마다 수만 가지 예술품으로 장식하고 각각 다양한 종류의 은총들로 가득 채우신다. 상당히 복잡하고 서로 얽혀 있지만 혼란스럽거나 어수선한 예술품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척이나 질서 있고 정리된 다양함으로 서로 구별되어진다. 다른 것들도 이처럼 비교해 본다면 이 세상이라는 궁전의 창조주께서 얼마나 완벽하신지 태양이 존재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알게 될 것이다.”[6] 그 궁전은 ‘완벽함의 언어’로 창조주를 찬미하고 있다. 완벽한 예술품을 만드신 전문가의 특징들의 완벽함을 지각이 있으며 생각하는 사람에게 보여준다. 이를 종합해 보면 완벽한 체계와 질서 속에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들을 창조한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인간은 의식하며 숭배를 한다. 경배를 왜 하는지 그리고 창조주에 대한 어떤 책임이 있는지 알고 있다. 이렇듯 경배란 무척이나 광범위하다. 의식이 없는 피조물들은 자신의 한정된 삶의 범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배를 행한다. 이것의 찬미들은 천사들을 대표한다.”[7] [1] 꾸란 사드장 38장 : 18~19절 [2] 꾸란 누르장 24장 : 41절 [3] 꾸란 이스라장 17장 : 44절 [4] 리살레이누르 모음집중 편지들 (Mektubat) p. 562 [5] 리살레이누르 모음집중 말씀들 (Sözler) p. 691 [6] 리살레이누르 모음집중 말씀들 (Sözler) p. 96 [7] 리살레이누르 모음집중 말씀들 (Sözler) p.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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